출처 :
http://www.hani.co.kr/arti/culture/entertainment/120707.html

[한겨레] 만화영화 〈보노보노〉에 나온 아기 해달 ‘보노보노’. 그 캐릭터를 묘사하려면 꽤 긴 수식어가 필요하다. 여유롭지만 쉽사리 공포에 질리는, 약간 염세적이면서도 세상이 무척 궁금한, 귀엽지만 살짝 우울한, 단순하면서도 철학적인…. 이를 목소리 하나로 살려내는 사람이 성우 박은숙이다. 아기 해달과 너구리, 다람쥐의 알콩달콩 숲속 생활을 그린 〈보노보노〉의 한국어 번역판은 성우들의 명연기 덕에 원작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도 받았다.

만화영화라는 기회의 땅에서 성우들이 스타로 뿌리를 내려간다. 뭇 연예인들 못지않게(그만큼은 아닐지라도) 팬들이 그들 활동의 낟알까지 주워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다. 생일을 챙겨 모임을 열고, ‘더빙쇼’를 펼칠 공연을 기획한다. 성우의 목소리 파일을 공유하며 연기 한마디에 열광한다. 〈원피스〉 〈이누야샤〉 〈개구리 중사 케로로〉 등 다양한 작품에 꽂힌 마니아들은 그 애정을 성우에게도 아낌없이 보낸다. 이들의 관심은 비단 미소년 목소리의 주인공 엄상현, 강수진이나 예쁜 소녀 역의 정미숙 등에게로만 향하지 않는다. 음침한 ‘썩은 소리’ 덕에 악마 역 단골인 시영준이나 ‘귀여운 케로로’ 양정화처럼 개성파에도 빠져든다.

팬층도 초등학생부터 20대 후반까지 넓은 편이다. 이들의 결성엔 1995년 생긴 케이블 방송의 만화 전문 채널들이 한몫했다. 〈투니버스〉 〈챔프〉 〈애니원〉 등은 만화영화에 덧씌워진 ‘어린이용’이란 꼬리표를 떼고 ‘성인’ 작품들을 내보냈다. 지난 4월엔 위성방송(스카이라이프)에 일본만화 전문 채널 〈애니맥스〉가 15살 이상 프로그램을 보강해 자리잡았다.

만화영화뿐만 아니라 게임 캐릭터 등 새로운 영역을 넓혀가는 성우들은 낭랑한 목소리보다 개성을 매력의 새 무기로 빼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불안하다고 한다. 한국 영화에 동시녹음이 도입되고, 라디오 드라마가 사라져가며, 외화의 인기도 한풀 꺾이는 과정에서 그들은 위기를 이미 겪었다. 여기에 극장판 만화영화엔 성우 대신 인기 배우들의 이름이 내걸리고 있으니 말이다. 〈챔프〉의 김정규 피디는 “목소리 연기를 성우만 해야 하는 건 절대로 아니지만 목소리만으로 캐릭터를 충분히 표현하는 데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며 “외모만 그럴듯하고 대사 소화에 한계가 있는 ‘초보 배우’를 홍보 차원에서 뽑아 쓴다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그래픽 홍종길 기자 jonggeel@hani.co.kr

짱구야~ 성우들 인기 좀 말려줘!

엉뚱한 꼬마 ‘짱구’ 박영남, 지구를 정복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지만 가사도우미 일에 정신 팔려버린 개구리 중사 ‘케로로’ 양정화, 온갖 요괴·악당·변태를 도맡아 하는 시영준, 〈바람의 검심〉의 우수 깃든 무사 겐신처럼 미소년 역에 안성맞춤인 엄상현…. 캐릭터가 뜨면 성우도 날개를 단다. 회원 수백에서 수천명씩 있는 팬클럽 한두개쯤은 거뜬하다.

지난해 1월 서울 중구청소년회관에선 콘서트 ‘투피스’가 열렸다. 주인공은 탐정 김전일 등 열혈 소년 목소리의 강수진(41)과 〈이누야샤〉의 가영 등 청순한 만년 소녀 캐릭터 정미숙(44). 둘의 팬클럽 회원들이 발품 팔아 164석을 유료 관객으로 채웠다. 회원들이 콩트 대본을 쓰고 〈카우보이 비밥〉 등 영상도 편집했다. 여기에 맞춰 두 성우는 ‘더빙쇼’를 선보였다. 이들에 대한 궁금증을 푸는 토크쇼가 이어졌다. 강수진의 팬클럽은 지난해 8월에도 ‘여름파티’라는 비슷한 공연을 벌였다. 2천여명이 가입해 있는 이 팬클럽의 회장은 “애니메이션이 발전한 일본에선 성우의 인기가 다른 연예인 못지않은 사례가 많고 이런 콘서트도 잦다”고 말했다. 정미숙의 팬클럽 회장 신정욱(24)씨는 “보통 정기 모임 때는 회원끼리 편을 갈라 목소리 연기 대결도 벌이며 논다”고 말했다. 성우의 생일을 챙기고 뉴스를 끌어 모으며 연기에 대한 이런저런 평가로 사이트를 메우는 건 여느 연예인의 팬클럽과도 비슷하다.

캐릭터 뜨자 연예인 못잖은 팬클럽
‘썩은 소리’라도 개성파라면 각광
“농담·즉흥대사…매력 만들기 나름”

강수진·정미숙 팬클럽은 성우 팬클럽의 ‘원조 격’이다. 결성은 천리안 등 피시통신이 싹틀 무렵인 10년 전께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수진 팬클럽 회장은 “1990년대 중·후반께 케이블에 투니버스 등 애니메이션 전문 채널이 등장하고 지상파에서도 ‘슬레이어스’ 등 어른들도 볼만한 애니메이션을 틀기 시작했다”며 “이때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성우들에 대한 관심도 늘었다”고 설명했다. 팬의 주축은 중·고등학생이지만 초등학생부터 20대 후반도 빠지지 않는다. 애니메이션에 대한 애정이 성우에게 옮아간 이들이 많다.

1995년 투니버스 공채 1기로 성우를 시작한 양정화(36)도 2001년께 팬 카페를 얻었다. 팬클럽이 힘을 받는 덴 〈개구리 중사 케로로〉가 한몫했다. 일본 티브이도쿄의 원작 애니메이션을 바탕으로 했지만 케로로 목소리의 절반쯤은 그의 창작물이다. “원작의 의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캐릭터를 분석해요. 원래 케로로는 더 똘망똘망한 목소리였어요. 여기에 비굴한 면모를 보탠 거죠. 뭔가 모자란 듯한 사람이 요즘 더 인기잖아요.” 이런 식으로, 문을 닫으면 새끼발가락이 끼고 버스만 탔다 하면 거꾸로 타는 케로로의 매력에 방점을 찍었다. 〈이누야샤〉의 ‘가영’, 〈원피스〉의 ‘나미’ 등을 연기한 정미숙도 “한국 정서에 맞도록 캐릭터를 다시 창조한다”며 “즉흥적으로 유행어도 집어넣어 대사도 맛깔스럽게 만든다”고 말했다.

하지만 개악했다가는 재패니메이션(일본 애니메이션) 마니아들의 쓴소리를 듣기 일쑤다. 〈바람의 검심〉에서 ‘겐신’을 일본에선 여성 성우가 맡았는데 한국에선 〈빨간 머리 앤〉의 ‘길버트’ 역 등을 연기한 엄상현(35)이 대신했다. “왜 남자가 하냐고 난리가 날까봐 부담이 됐어요. 흰머리가 생기고 살도 2㎏이나 빠졌죠. 마니아들 입김도 무시할 수 없어요.”

수많은 마니아를 이끌 만큼 애니메이션이 어린이용 오락물을 넘어 다양하고 심도 깊어지면서, 성우들의 표현 영역도 넓어졌다. 성우들은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보다 개성 있는 목소리가 사랑받는 시대라고 말한다. 〈개구리 중사 케로로〉에서 강한 척 걸걸하지만 한없이 수줍은 ‘기로로’ 역의 시영준(37)은 그 개성 덕을 톡톡히 봤다. 2004년에 생긴 팬 카페엔 회원이 430명 모였다. “팬 카페 보고 저도 신기했어요. 예전 같으면 애초에 성우 되기 힘든 목소리죠. ‘썩은 소리’잖아요. 악마도 2천~3천년 된 대마왕급만 주로 맡아요. 처음엔 나름대로 좌절도 했어요. 딱 한마디 하는 남학생이었는데 호흡이 거칠고 음산해서 결과를 보니 악마 중학생이 돼 있는 거예요.” 〈반지의 제왕〉 등 영화 예고편이나 〈진삼국무쌍〉 등 게임에서도 그의 목소리를 만날 수 있다. “게임 작업 할 땐 영상 없이 상상만으로 대사의 느낌을 살리기도 하죠.”

게임 캐릭터뿐이겠나? 투니버스에서 애니메이션 주제곡 모음으로 내놓은 앨범 〈위〉에는 양정화·이명선·이자명 등 성우 5명이 함께 부른 〈고고 다섯 쌍둥이 2〉의 시작 노래, 〈달빛 천사〉의 주인공을 맡은 성우 이용신이 부른 ‘3분35초’가 들어 있다.

인기 있는 성우라지만 몸값이 솟아오르지는 않는다. 지상파 방송 4개사와 투니버스 공채에 뽑히고 한국성우협회에 가입해야 정식 성우로 인정받는데 출연료는 협회 차원에서 정한다. 소속 기간을 마치고 10년이 지나면 에이급, 그 아래는 비급으로 같다. 양정화는 “개런티가 다른 부문에 비해 적어 다작을 할 수밖에 없다”며 “여러 주인공을 맡다 보니 겹치지 않도록 변신해야 해 힘들다”고 말했다. 강수진은 “제작자들이 비주얼에 들이는 투자에 비해 오디오엔 너무 인색하다”고 덧붙였다.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