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향·문화평론가

웃음은 예외적인 것이다. 웃음은 상식적인 사건에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상식과 관계 없이 그저 황당하기만 한 사건에서도 생겨나지 않는다. 상식을 뛰어넘고 있으나 그 뛰어넘는 상식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는 자리, 그 자리가 희극적인 웃음의 자리다.

가장 웃음을 만들기 좋은 자리는 금기와 허용의 경계선 부근이다. 일단 금기시되는 사태는 그만큼 우리의 관심을 자극하기 때문에 웃음을 만드는 좋은 재료가 될 수 있다.

사실 금기는 무섭다. 금기가 금기로 작용하는 동안 금기는 권력이고 힘이기 때문이다. 금기는 그 세계에서 사는 모든 존재에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블랙홀 같은 금기는 그 세계로 빠져드는 모든 존재를 하나도 남김 없이 산산이 부서뜨린다.

블랙홀에 마력이 있듯이 금기에도 마력이 있다. 금기가 깨어진 후라면 대부분 권태로운 일상으로 돌아갈 행위라도 일단 금기시되면 신선하고 짜릿한 열망의 원천이 된다.

금기와 가장 가까운 사태는 어떤 사태일까? 그것은금기의 허용선 저편, 즉 허용된 사태들이다. 성적인 생활을 하는 부부나 아이들을 훈계하는 어른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이런 사태가 당연할 때 부부가 아닌 관계의 성생활은 불륜이나 부도덕이 되며, 어른의 훈계를 거스르는 아이는 배우지 못한 놈’이 된다.

배우지 못한 짱구가 배운 어른들을 희롱하면서 헛헛한 웃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기존의 금기들을 건드려 보는 악동 짱구는 못 말리는 짱구다. 그러나 짱구는 기상 천외할 뿐 황당하지는 않다. 짱구식 논리가 지지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논리란 어떤 걸까?


아이가 여자를 밝힐 때
이가 썩은 짱구는 치과엔 가기 싫다. 이가 아픈 것보다 치료하는 게 더 아플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짱구를 아는 엄마가 유혹한다.

“오늘 가는 병원에는 롱다리 누나들이 많이 있단다.”

엄마는 짱구가 어른 못지 않게 여자를 밝힌다는 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치료를 받는 짱구는 ‘섹시한 몸매’라는 마취약에 치료의 아픔을 잊을 수 있었다. 아니, 치료는 감미롭기까지 했다. 그래서 짱구는 생각한다. 생각보단 아프지 않다고.. 그리고는 집에 와서 초콜릿과 사탕을 잔뜩 먹는다. 섹시한 여인의 치료를 또 받기 위해서.

짱구는 못 말린다. 엄마의 브래지어로 마스크를 만들고 자기 성기 부근에 엄마의 립스틱으로 코끼리를 그려넣는 일은 예사다. 목욕한 후에는 목욕 타월만 걸치고 길거리로 나가 여자를 유혹하기도 한다. 마음에 드는 것을 짚으라는 햄버거집 점원의 말에 점원 아가씨의 가슴을 꾹 누르고….

이게 어떻게 아이의 행동일까?

아이답지 않은 짱구는,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는 규범을 깨고 있다. 그러나 짱구는 여전히 아이다. 짱구가 어른들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애어른이라면 만화는 웃음보다 짜증이 나겠지만 짱구는 어른들의 행위만을 모방할 뿐 여전히 철 없는 아이로 남아 있다. 애어른의 행위인 줄 알았던 행위가 철 없는 아이의 행위였음이 드러나면서 짜증이 되려고 했던 관심은 웃음이 된다.

알몸으로 여자를 유혹하려는 짱구의 몸짓은 여자를 유혹하는 행위가 아니라 아빠가 엄마에게 했던 행위의 모방일 뿐이다. 야단 치는 어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짱구는 무심히 한마디 한다.

“아빠가 가르쳐 준건데.”

어느 날 짱구는 이부자리 위에 누워본다. 짱구는 팔베개를 만들면서 아빠에게 옆에 와서 누우라고 한다. 아빠가 화를 낸다.

“무슨 짓 하는 거야, 빨리 옷이나 갈아입어!”

그 야단에도 짱구는 기죽지 않는다.

“치사하게, 엄마랑은 레슬링 하면서.”

어른들 세계를 흉내내면서도 짱구는 그 논리에 길들여지지 않는다. 그 자리가 ‘못 말리는 짱구’가 웃음을 만드는 자리이다.


앙금이 남는 웃음
금기 때문에 힘이 생기고 빛이 났던 행위들은 금기가 깨진 자리에선 싱겁기 그지없다. 싱거워진 금기가 금기일까? 더 이상 내 마음을 구속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금기가 아니지만 사회 구성원을 통제하는 힘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여전히 금기다. 내게 금기가 아닌 것을 타인에게 금기시하는 데서 허위 의식이 싹 튼다. ‘내가 하면 낭만, 남이 하면 스캔들’인 행위 패턴의 세계에 어린 악동이 끼여들면서 그 일상적인 생활양식의 허위성을 폭로하는 재미, 그것이 짱구는 못말려」의 재미다.

그러나 나는 그 짱구 또한 허위 의식의 산물임을 부정할 수 없다. 어른들의 논리에 길들여지지 않는 짱구는 여전히 어른들의 세계를 흉내내고 있기 때문이다.

짱구가 어른들의 논리에 길들여지지 않는 건 어른들이 아이를 보는 방식에 갇혀 있지 않기 때문이지만, 상상력이 풍부한 짱구가 기껏 만드는 자기 세계란 기존의 세계에 대한 반항도 아니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도 아니다. 예쁜 여자가 관심을 끌고 섹시한 여자가 힘이 있는 그런 세계다. 「짱구는 못말려」가 제공하는 웃음이 허탈한 건 그것이 철저한 인간 이야기가 아닌 성 이야기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성은 철저히 인간적일 수 있다. 그런데 한편에선 성에 관한 편견들을 보여줌으로써 공감을 얻어내는 만화가, 여전히 성과 인격이 대립되는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는 것은 소외 중의 소외가 아닐까? 결국 「짱구는 못말려」가 주는 웃음은 상쾌한 웃음이라기보다 앙금이 남는 웃음이다. 그 앙금에 걸리는 자가 많을 때만 「짱구는 못말려」는 무해할 것이다.